찬란의 시집은 생의 절박함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병률시인은
1967년 충청북도 제천 출생으로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 창작과를 졸업했으며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좋은 사람들'과 '그날들'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작품은
시집
2003년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2006년 바람의 사생활
2010년 찬란
2013년 눈사람 여관
2017년 바다는 잘 있습니다
2020년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2024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산문집
2005년 끌림
2012년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015년 내 옆에 있는 사람
2019년 혼자가 혼자에게
2022년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10년 찬란 시집에 수록된 시 여러 편을 올려봅니다
찬란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하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 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에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 것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리고도 겨우 1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 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얼굴을 그려 달라 해야겠다
세상 끝에 편의점이 있다니
무엇을 팔까
장화를 팔까
얼음 가는 기계를 팔까
이 여름 냄새를 팔까
여즉 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해야겠으니
생각나는 한 사람 얼굴을 그려 달라고 해야겠으니
도화지가 있느냐 물어야겠다
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하니
주인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 해야겠다
얼굴 그림을 그려 달라 해야겠다
그 그림이 나의 얼굴이거나
혹은 한 사람의 옆얼굴이어도
얼은 영혼이란 뜻이라니
굴이라는 말이 길이라는 뜻이라니
세상 모든 나머지를 파는 편의점에 가서
조금만 틈을 맞추고 와야겠다
세상 끝을 마주하다가 낯을 씻고
아주 조금만 인사를 하고 와야겠다
유리병 고양이
들어가겠다는 건지
나오겠다는 건지
고양이 한 마리 병에 머리를 넣고 간다
아니다 머리에다 병을 넣은 것이다
어느 곳에도 부딪치지 않는 병은
고양이 목을 고요히 감싸고 있다
밤에는 전구 불빛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
유리병 고양이는 숨이 찰 때마다
숨을 덜 쉬어야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유리병을 깨면 살 수 있겠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으나
이미 고양이는 나무 위로 올라가 숨어 살고 있었다
나무를 베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을 거라 입을 보았지만
나무는 주인이 있었고 마침 주인은 없었다
배가 고플 것이지만
만족스러워할 수도 있었다
병 안에 옹색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중얼거리지만
사람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했다
며칠 후 아직 동도 트지 않는 새벽
유리병 하나가 발견되었다
유리병 안에 아주 완벽하게 고양이가 들어가 있었다
차라리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봉지 밥
봉지 밥을 싸던 시절이 있었지요
담을 데가 없던 시절이었지요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넣고
가슴팍에도 품었지만
어떻게든 식는 밥이었지요
남몰래 먹느라 까실했으나
잘 뭉쳐 당당히 먹으면 힘도 되는 밥이었지요
고파서 손이 가는 것이었지요
사랑이지요
담을 데 없어 봉지에 담지요
담아도 종일 불안을 들고 다니는 것 같지요
눌리면 터지고
비우지 않으면 시금치금 변해 버리는
이래저래 안쓰러운 형편이지요
밥풀을 떼어 먹느라 뒤집은 봉지
그 안쪽을 받치고 있는 손바닥은
사랑을 다 발라낸 뼈처럼
도무지 알 길 없다는 표정이지요
더 비우거나 채워야 할 부피를
폭설이 닥치더라도 고프게 받으라는이 요구를
마지막까지 봉지는 담고 있는지요
바람이 빈 봉지를 채 간다고
마음 하나 치웠다 할 수 있는지요
밥을 채운 듯 부풀려
봉지를 들고 가는
저 바람은 누군지요
가끔 종이 글이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시를 읽는다
누군가의 감정을 내 뜻 데로 해석해도 되고 똑같은 일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보고 표현하는 것에 좋고
읽고 나면 여운이 남아서 ......
다시 읽고 하는 것 같아요